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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정말로 나니아가 있어요?”

정인영


저는 경기도의 한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나니아 연대기를 읽어 주고 있습니다. 첫 해엔 한두 권만 읽어 주었는데 나중엔 아예 1년 동안 7권을 다 읽어 주었습니다. 초기엔 미리 읽어보지 못하고 읽어 준 책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에 아이들은 더 재미있어하더군요. 선생님이 책을 읽다말고 “얘들아, 이거 진짜 신기하지 않냐? 진짜 재밌다.”고 하면서 킥킥대고 있으니 아이들은 웃겼겠죠. 

이렇게 하다 보니 벌써 5년 넘게 나니아 연대기를 읽어 주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읽었습니다. 요즘엔 아이들과 함께 읽거든요. (아슬란을 제외한 모든 역할은 나누어 읽습니다. 아슬란은 권위 있는 인물이기 때문에 항상 제가 읽고 어쩌다 한번씩 읽을 기회를 줍니다. ) 저처럼 나니아 연대기를 5번 이상 소리내어 읽은 사람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5년 이상 아이들과 나니아 연대기를 읽으며 느낀 점을 나누고 싶습니다. 

1. 권위

먼저 ‘권위’입니다. 요즘이야 말로 아이들이 권위를 느끼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조선시대처럼 왕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일제시대처럼 모두의 존경을 받는 독립투사가 있거나 ‘독립’이라는 공동의 목표, 내 삶에 권위로 다가오는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민주화 투쟁도 지나갔고 통일은 피부로 와 닿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무서워하거나 존경할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예전처럼 ‘몽둥이를 들어서라도 인간을 만들자’는 부모도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나의 훈계가 아이들의 사고를 제한하지는 않을까?’ 조심하는 부모가 늘고 있습니다. 초등학생이 대통령을 ‘명박이’라고 부르는 시대이니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권위의 부재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부재와 연결됩니다. 아이들에게는 ‘자신보다 크고 대단하고 무서우며 그 앞에 엎드려야 하는 존재’가 없습니다. 하늘과 같은 왕도 없고, 햇빛과 같은 아버지도 없고, 별과 같이 모두가 우러르는 인물도 없습니다. 예전처럼 종과 주인의 관계도 경험할 수 없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이라는 말을 들어도 그에 맞는 이미지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엔 과학도 일조를 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이미지를 주지 못하면 자연이라도 주어야 하는데 요즘은 하나님을 태양이나, 불, 바다로 비유할 수도 없습니다. 태양은 거대한 가스덩어리이고 우리가 잘 이용해야 할 대상이며 주기에 맞추어 움직일 뿐입니다. 불은 어떤 물질이 산소와 결합하여 열과 빛을 내는 현상일 뿐입니다. 불을 어떻게 끌 수 있는지도 다 압니다. 바다 역시 잘 이용해야할 자원이며 인간은 이미 가장 깊은 마리아나 해구의 바닥까지 가 보았습니다. 아이들이 어디서 하나님의 이미지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이미지는 하나님이 아니니 걱정할 필요 없다고요? 루이스가 지적한 대로 이미지를 거치지 않고 하나님을 알 수는 없습니다. 어른들이 뭐라고 하던 아이들은 ‘하나님’이라는 말을 들으면 자신만의 이미지를 만들어 낼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미지는 하나님의 대한 오해를 낳기에 아주 적합하며 겉으로 표현하지 않기 때문에 어른이 될 때까지 점검할 기회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니아 연대기에는 하나님의 권위를 느낄 수 있는 존재가 있습니다. 바로 ‘아슬란’이라는 사자입니다. 아슬란은 노래로 나니아를 창조했으며 입김을 불어 넣어 동물들이 말을 할 수 있도록 합니다. 배신자를 위해 자기의 목숨을 바쳤으며 나니아의 모든 고통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길들여지지 않은 사자’이기 때문에 보고 싶다고 불러 낼 수 없습니다. 어려움이 닥쳤다고 해서 항상 도와주는 것도 아닙니다. 나니아의 비버는 아슬란을 ‘착하면서 동시에 무서운 존재’라고 얘기합니다. 잠시 대화를 들어 보시죠.

비버부인이 말했다.
“당연히 그렇겠죠. 만일 아슬란 님 앞에서 무릎을 덜덜 떨지 않을 수 있다면 아주 용감한 자거나 바보 멍청이거나 둘 중 하나겠죠.”
루시가 물었다.
“그럼 안전하지 않단 소리예요?”
비버 씨가 말했다.
“안전이라고요? 지금 우리 집사람이 한 말 못 들었나요? 누가 안전하다고 했죠? 당연히 안전하지 않아요. 하지만 좋은 분이세요. 아까 말했던 것처럼 그분은 왕이신걸요.”

‘착하면서 동시에 무서운 존재’는 권위의 양면을 얘기해 줍니다. 권위가 있으려면 착하기만 하거나 무섭기만 하면 안됩니다. 하지만 요즘은 착하면 무섭지 않고 무서우면 착하지 않습니다. 부모와 교사들은 착해지려고 노력합니다. 최대한 이해하고 받아주고 기다려 주는 것이 요즘의 미덕입니다. 무서운 부모와 교사아래서 자란 세대가 변화를 시도하는 것이니 좋게 봐주고 싶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런 착한 부모나 교사를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혼내지 않을 걸 알기 때문에 하고 싶은 대로 하죠. 또한 요즘 무서운 사람은 다 나쁜 사람입니다. 무서운 부모는 아이를 때리거나, 전혀 용서를 하지 않거나 감히 말붙일 생각을 못하게 만드는 부모입니다. 무서운 교사란 매를 들거나 욕을 입에 달고 사는 교사입니다. 또한 사회에서는 조직폭력배나 권력으로 횡포를 부리는 사람이 무서운 사람이죠. 어딜봐도 착하면서 무서운 존재를 만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아슬란은 나니아 국민을 위해 목숨을 내놓기까지 착합니다. 엄마가 병에 걸렸고 그게 항상 맘에 걸린 남자아이 앞에서는 눈물을 흘립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남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뉘우치면 누구라도 받아줍니다. 또한 아슬란은 무섭습니다. 하얀마녀를 한입에 끝냈으며 그의 포효소리 한번이면 나니아 전체가 두려움에 떱니다. 나니아 국민에겐 아슬란의 뜻을 따르든지 안 따르든지 두 개의 길 밖에 없습니다. 그의 뜻을 의심하거나 자의로 해석할 수 없습니다. 따르는 자는 구원받지만 따르지 않는 자는 죽습니다. 

5년 동안 나니아 연대기를 읽으면서 아슬란을 좋아하지 않는 아이를 본 적이 없습니다. ‘아슬란을 만나고 싶은 사람?’라면 모두 손을 듭니다. ‘얘들아 아슬란은 엄청 두려운 존재라고 했어. 너희를 잡아 먹을수도 있어. 그래도 만나고 싶어?’라고 해도 모두 손을 듭니다. ‘아슬란의 갈기에 파묻혀 얼굴을 비비고 싶은 사람?’하면 손을 들지 않는 아이들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 남자아이들로서 그 행동이 여자아이답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 역시 예전엔 ‘아슬란의 갈기에까지 파묻힐 필요가 있나’했지만 요즘은 바뀌었습니다. 그 품에 얼굴을 묻고 울다가 웃다가 소리지르고 노래도 하고 싶습니다.

아이들은 아슬란은 우리가 쉽게 어떻게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압니다. 그 앞에서 무례한 장난을 치거나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아이들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책에 명시되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책을 읽다 자연스럽게 느끼는 것입니다. 이점에선 루이스가 성공한 것 같습니다. 루이스의 말을 들어보시죠.

“그리스도의 고통을 느끼는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왜 그렇게 힘들었을까요? 그것을 의무라고 여긴 것이 가장 큰 이유인 것 같습니다. 무언가를 의무적으로 느껴야 한다면 감정은 굳어 버리지요. ……그러나 이런 것들을 교회 창문에 새기거나 주일학교 교리로만 가르치지 말고 상상의 세계로 보낸다고 생각해 보세요. 처음으로 그런 것들이 힘을 발휘하지 않을까요?”

어른 그리스도인은 모두 ‘하나님은 정의롭고 선하시다.’고 말하지만 그 말에 어떤 의미인지 잘 느끼지 못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그저 그렇게 들어왔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주형틀은 있지만 부을 쇳물이 없습니다. 하지만 아슬란을 보면 하나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모세가 떨기나무의 불 속에서 하나님을 보았듯이 우리 아이들은 아슬란의 포효소리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2. 의식 

두 번째 ‘의식’입니다. 의식 역시 하나님을 알아갈 수 있는 통로입니다. 의식이란 나보다 크고, 위대하며, 오래된 것과 접속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인지 성경에는 의식이 많이 나옵니다. 피흘리는 제사, 해마다 반복되는 절기, 정체성을 새기는 할례. 이 뿐 아닙니다. 신약에선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만찬과 세례의식도 남겨 주셨습니다. 

하지만 요즘 아이들은 의식다운 의식을 경험할 일이 별로 없습니다. 성인식도 하지 않고 책례도 하지 않습니다. 졸업식과 입학식은 형식적인 것이 많습니다. 결혼식장은 신혼부부생산공장 같습니다. 마을 공동체가 없기 때문에 추석이나 설같은 명절도 용돈 많이 받는 날이 되어 버렸습니다. 각종 국경일도 TV에서 하는 기념식을 보지 않는다면 어떤 날인지도 모릅니다. 뭔가 의미를 되새기고, 복장을 갖추고, 마음을 가지런이 하며 입을 다물고 귀를 기울일 일이 별로 없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나니아 연대기에는 의식이 많이 나옵니다. 나니아의 창조 자체가 하나의 의식이었으며 네 아이는 대관식을 거쳐 왕이 됩니다. 일주일씩 잔치가 벌어지기도 하고 모든 임무를 완수한 아이들이 아슬란과 나누는 대화는 의식처럼 치러집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도 의식을 경험하게 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단 책 한권이 끝나면 독서보고서를 쓰게 합니다. 물론 쓴다고 다 통과되는 것은 아닙니다. 쉽지 않습니다. 통과되면 아슬란 도장을 찍어줍니다. 이 도장은 아무 때나 찍어주지 않고 공을 들여 완수한 것에만 찍어줍니다. 의식은 아무나 참여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러면 아이들은 학급화폐로 직접 배지를 삽니다. 그냥 줄 줄 알았는데 사라고 하니 ‘안 사요!’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사지 말라고 합니다. 하지만 바로 꼬리를 내립니다. 나중에 아슬란 배지를 사려면 7권에 해당하는 배지가 다 있어야 하거든요. 한 권을 다 읽고 독서보고서까지 통과해야 배지를 살 수 있고 이 배지가 있어야 의식에 참석할 수 있습니다. 혹 배지를 집에 두고 온 아이는 학급화폐를 내고 대여해야 합니다. 의식은 엄숙하게 치러집니다. 전등을 끄고 커튼을 칩니다. 탁자를 마련하고 식탁보를 깝니다. 초를 켜고 와인잔에 포도주스를 따르고 나니아 옷장문을 통해 입장합니다. 명구를 외우고 잔을 부딪히고 소감문을 발표합니다.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눠 주셔서 감사합니다.’같은 인사말을 주고 받습니다. 준비해 온 음식을 나눕니다.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선 의식의 내용을 기억하지는 못할 것입니다.(제 기억력으로 보자면 거의 확실합니다!) 다만 의식의 분위기를 기억할 것입니다. 공을 들여야 하고, 참여하기 위해선 준비를 해야하고, 말을 아끼고 상대방에 집중해야 하며, 어른으로 대우받았던 흐뭇한 이미지 하나를 기억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나중에 ‘하나님’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이 이미지가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과학적 사고로부터 잠시 벗어나기

세 번째 과학적 사고로부터 잠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앞부분에서 말씀드린 대로 과학은 자연에서 신성을 벗겨 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을 숭배할 위험에서 벗어났지만 자연에서 하나님의 신성을 볼 기회도 빼앗겼습니다. 자연을 보며 감탄하지 않습니다. 섭리를 느끼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입김이 지금도 자연에 힘을 주고 있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렇다보니 자연스럽게 기적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니아는 동물이 말을 합니다. 아이들은 신기해 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말을 하는 것은 신기해 하지 않습니다. 나니아가 건국될 때는 땅에 동전을 심으면 동전나무가 자라고 사탕을 심으면 사탕나무가 자랐습니다. 참 신기하죠. 하지만 씨앗을 땅에 심으면 토마토도 되고 사과도 되고 봉숭아도 된다는 것은 신기해 하지 않습니다. 작고 검은 것을 심으면 크고 화려한 것이 나온다는 것을 신기해 하지 않습니다.

나니아는 아슬란이 노래로 창조했습니다. 아이들이 아주 신기해 합니다. 그러면 제가 묻습니다.

“얘들아, 나니아는 노래로 창조했대. 그럼 우리세계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좀 똘똘한 아이들은 빅뱅을 얘기합니다. 그러면 제가 묻습니다.

“빅뱅은 시간도 공간도 없는데 폭팔이 일어났고 그 폭팔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었으며 지금도 빛의 속도로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이론이야.”

이렇게 얘기를 해 주어도 아이들은 우리세계가 더 신기하다고 합니다. 그러면 다시 몇 번 설명을 합니다. 그러면 똘똘한 아이들은 그제서야 우리 세계가 더 신기하다고 말을 합니다. 

성경의 오병이어 기적이나 물이 포도주로 변한 기적을 받아들이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시간낭비일 때가 많습니다. ‘성경에 얼마나 기적이 많이 나오냐. 하나님은 기적을 행하실 수 있는 분이다.’라고 얘기하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많습니다. 오히려 ‘우리 세계의 존재 자체가 기적이다. 제대로 보기만 하면 우리 삶에 기적이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얘기하는 것이 더 맞습니다.

나니아는 우리세계를 비교하다 보면 우리세계가 얼마나 신기한지 알 수 있습니다.

4. 천국에 대한 그리움

네 번째, 천국에 대한 그리움입니다. 나니아 연대기를 읽으면 아이들이 항상 질문하는 것이 있습니다. 

“선생님, 나니아가 정말로 있어요?”

똘똘한 아이들은 그 아이를 보면서 혀를 쯧쯧 찹니다. 

“야, 그걸 믿냐? 그건 책에서나 나오는 거지.”

그러면 제가 묻습니다.

“아, 그렇구나. 그럼, 책에 나오는 것은 다 실제로 없는 거네?”

“그건 아닌데요. 이건 소설책이잖아요. 다 상상해서 쓴 거라고요.”

“그렇구나. 그럼 두 가지만 질문하자. 첫째, 소설속에 나온 이야기는 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겠네? 둘째, ‘나니아’라는 나라는 없어도 나니아 같은 나라도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이 쯤 되면 진지한 토론이 시작됩니다. 물론 이야기를 길게 이어갈 실력이 있는 아이들은 별로 없습니다. 공정하게 토론이 진행되면 대개 알 수 없다는 식으로 마무리 됩니다. 하지만 나니아가 정말로 존재하냐고 물었던 친구에게 혀를 찼던 그 아이는 다음 번에도 코웃음을 치긴 힘듭니다. 게다가 나니아는 소설속의 나라일 뿐이라고 하는 친구도 ‘나니아가 정말로 존재한다면 가고 싶은 사람?’라고 물으면 손을 번쩍 듭니다. 돌탁자에 앉아서 고대글씨를 만져보고 베루아 평원을 달리며 비버의 집에 초대받고 배불뚝이 곰 삼형제의 동굴을 방문하고 싶어합니다. 캐어패러벨 성의 네 왕좌에 앉고, 무도회에 참석하며 새벽출정호를 타고 동쪽바다로 나가고 싶어합니다. 무엇보다 마녀의 터키젤리를 먹고 싶어 합니다. 그러면 제가 얘기해 줍니다.

“얘들아, 옛날의 그 터키젤리는 마법의 터키젤리는 너무 위험해서 구할 수 없어. 대신 지금 나니아의 비버 기념품점에 가면 독성은 없지만 맛은 똑같은 터키젤리를 살 수 있단다. 다음에 내가 나니아에 가면 한번 구해볼게.”

아슬란이 직접 말했습니다.
“내 나라로 통하는 길은 어느 세계에나 있느니라.”

또한 나니아의 탄생을 지켜 보았던 디고리커크 교수님은 피터의 질문에 이렇게 답합니다.

피터가 말했다.
“그렇다면 교수님께선 정말로 다른 세계가 있을 수 있다는 말씀이세요? 여기저기 어디에나, 바로 코앞에도요?”
“암, 있을 수 있고말고.”
교수는 안경을 벗어서 닦으며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요즘 학교에서는 도대체 뭘 가르치는지 모르겠군.”-공립학교 교사로서 작가에게 강하게 불만을 갖고 있는 대목입니다.

어디에서나 나니아로 갈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기쁨인지 모릅니다. 아이들은 꿈을 꾸죠. 만약에, 정말로 만약에 나니아가 존재하고 또 나니아에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3월부터 지금까지 끈질기게 제게 질문을 던지는 아이가 있습니다.

“선생님 정말로 나니아에 가 보셨어요? 나니아가 정말로 있어요?”

그러면 전 놀라지도, 귀찮지도 않은 말투로 대답합니다. 

“음.”

그럼 또 묻습니다.

“에이, 거짓말. 그럼 다시 가 봐요. 어디서나 갈 수 있다고 했으니까 여기서, 우리 반 옷장을 통해 가 봐요.”

그럼 전 역시 동일한 말투로 답합니다.

“근데 나니아는 내가 가고 싶다고 해서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야. 아슬란이 불러야 갈 수 있어. 또 아슬란은 길들여지지 않은 사자라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단다. 디고리의 말 기억안나? 정말이지 나니아에 가려고 절대 애쓰지 말라는 말. 언젠가 너희들이 생각지도 않은 순간에 가게 될 거라는 말. 나도 이 말밖에 해줄 수가 없구나.”

방금의 몇 문장을 읽으면서 낯 선 나라로 여행을 떠나기 전날의 흥분이나, 처음 듣지만 나를 사로 잡은 음악, 구절 하나 하나가 내 몸에 와서 달라붙는 시, 온 몸을 개운하게 하는 향기를 떠올리신 분이 있다면 역시 나니나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루이스의 말대로 우린 천국아닌 것을 사모해 본적이 없습니다. 나니아 연대기를 읽는 아이들 역시 나니아를 사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상이 제가 나니아 연대기를 아이들과 함께 읽으면서 느낀 점입니다. 5번을 더 읽으면 어떤 소감이 추가될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전혀 다른 이야기를 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대가의 눈을 가지신 분이 있다면 그것이 전혀 다른 이야기가 아님을 아시겠죠. 오히려 같은 소설을 한국어와 영어로 읽듯이 전혀 다른 글자들이 같은 이야기를 말하고 있고, 전혀 다른 표지판이 같은 곳으로 인도하고 있음을 아시겠죠. 그리고 그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진행될 것입니다.





이종태

신학자 에밀 브룬너는 그의「교의학」에서, 열매를 두고 판단하자면 파스칼이나 키에르케고어 같은 사상가들이 이룬 업적이 역사상 모든 전문적 신학자들이 이룬 업적을 능가한다고 말한 바 있다. 칼 바르트의 기념비적인 저서「로마서 강해」에서도 가장 많이 인용되는 인물이 어거스틴도 칼빈도 아닌 도스토예프스키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파스칼, 키에르케고어, 도스토예프스키, 이들은 모두 평신도들이었고 본격적인 신학 저술을 남기진 않았지만, 일반 지성사회에 신학담론을 확장시키는 일에 그 어떤 신학자보다도 더 큰 업적을 남겼다.

우리가 영국의 문학교수였던 C. S. 루이스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적어도 지명도로 보자면, 현재의 추이로 보아 그가 저 위대한 ‘파스칼, 키에르케고르, 도스토예프스키’의 반열에 올라갈 가능성은 충분해 보인다. 영미권에서 루이스의 대중적 인기는 한국 독자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이다. 그의 책들은 사후 4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서점의 진열대 중앙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해마다 그에 대한 새로운 연구서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미 헐리웃은 그의 결혼과 사별 이야기를 다룬 ‘쉐도우 랜드’라는 영화를 내본 바가 있고, 요즘은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 그의 아동 판타지 시리즈를 영화로 만들어내고 있다. 루이스는 어거스틴 이래 가장 많이 인용되는 기독교 작가라는 통계도 나와 있다.

루이스만큼 에큐메니컬한 작가도 찾아보기 힘들다. 2005월 11월 7일자 타임지는, 영국 성공회의 충실한 신자였던 이 옥스브리지 학자를 즐겨 인용하는 인사들로, 타계한 교황 요한 바오로 II세, 그리스 정교회의 대표적 대변인인 칼리스토스 웨어 주교, 그리고 복음주의계열 메가처지 목사인 릭 워렌 등을 들고 있다. ‘순전한 기독교’, 즉 모든 교파적 차이를 뛰어넘는 기독교의 핵심 정수를 현대인의 피부에 와 닿는 생생한 언어로 제시하고자 했던 그의 노력은 그를 ‘회의론자들을 위한 사도’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그의 저술들을 범기독교계의 공동 지적 자산이 되게 했다.

‘순전한 기독교’주의자

현재 루이스의 가장 열렬한 팬들은 소위 ‘복음주의자들’이다. 그렇다면, 루이스는 복음주의자였을까? 영국 복음주의계의 대표적 지도자 J. I. 패커는 루이스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크리스처니티 투데이지에 기고한 글에서, 루이스의 신학사상이 복음주의의 일반적 신조들과 차이를 보여주는 몇 가지를 지적하고 있다. 가령, 루이스는 형벌대속설(penal substitution)이나 이신칭의 등을 강조하지 않았고, 성서무오류설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세례와 중생을 긴밀히 연결시켰고, 연옥 사상에 대해 호의적이었으며. 명시적 신앙 없이 죽은 이들에 대해서도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복음주의자들의 수호성인이라는 소리까지 듣는 루이스이지만 루이스는 복음주의자라기보다는 ‘순전한 기독교’주의자였다.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란 영국 성공회 성직자였던 리차드 박스터(Richard Baxter, 1615-1691)의 용어로서, 교파를 초월해 모든 시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공통적으로 믿고 고백해왔던 신앙의 공통분모를 일컫는 말이다. 기독교 변증가로서의 루이스의 업적은 이 ‘순전한 기독교’의 내용을 명료한 이성과 풍부한 상상력을 통해 현대인들의 지성과 영성에 어필하는 언어로 제시해주었다는 데에 있다. 그는 이 ‘순전한 기독교’와 비기독교적 사상들과의 차이가, 기독교내 서로 다른 교파들 사이에 존재하는 교리적 차이보다 훨씬 더 크고 중요하다고 보았다. 2000여년을 유유히 관통해오는 기독교의 ‘근본’(fundamentals)이 있고, 이 영원한 근본은 시대마다 늘 참신한 언어에 담겨 세상에 제시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의 신학적 저술들의 가치는 독창적 내용(‘what')보다는 창조적 표현 형식(’how')에서 찾을 수 있다. 그의 글에는 기독교의 오래된 어휘들과 진부한 개념들을 다시 살아 약동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루이스는 늘 겸손한 자세로 독자들을 감동시킨다. 그가 ‘비전문가로서 비전문가를 대상으로 썼다’고 밝히고 있는 「시편사색」에서 그는 ‘공부를 하다가 의심점이 생겼을 경우, 선생님께 그 문제를 여쭈어 보기보다는 옆에 있는 친구에게 물어볼 때 더 잘 해결되는 경우가 자주 있다’는 말로 자신과 같은 아마추어 신학자가 쓴 책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한다. ‘선생님들’ 즉 전문적 신학자들은 우리가 설명을 부탁하는 그 주제 자체를 전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기에, 학생이 대체 뭘 어려워하는지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신학자들은 우리가 정말로 알고 싶어 하는 것을 다뤄주지 못할 때가 많다.

그렇다고 루이스가 당시의 신학자 ‘선생님들’ 에 대해 늘 깍듯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다. 그는 당시 신학계를 풍미했던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맹렬한 비판자였다. 그는 현대의 많은 신학자들이 말하는 기독교는 ‘물탄 기독교’라고 말하며, 심지어 “그들에게 갈 때 당신은 지금 한 마리 양으로서 이리들 틈으로 가는 것임을 기억하라”라고 경고하기까지 했다. 특히, 평생을 신화를 읽고 연구해온 학자로서 루이스는 당시의 어떤 성서신학자들이 복음서를 쉽게 ‘신화’ 장르로 구분시키는 것에 대해 그것을 무지의 소산이라고 일축하기도 했다. 또 루이스는 신학자의 역할은 성경의 사상을 현대의 언어로 설명하는 것인데, 요즘 신학자들은 현대의 사상을 성경의 언어로 포장해 제시한다고 일갈할 적도 있다. 루이스는 전투적인 ‘순전한 기독교’주의자였다.

개신교 주류 교단 신학에서 ‘변증’(apologetics)이 주변 자리로 밀려난 것에는 나름의 타당한 신학적 역사적 이유가 있다. 그러나 변증에 무작정 무관심한 것은 어쩌면 지적 소심함이나, 신학적 허영이나, 혹은 더 나쁘게는, 구도자들에 대한 사랑 없음 때문은 아닌지 신학을 연구하는 이들은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루이스의 기독교 변증 작업은 우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이들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할 모든 이들에게 도전과 본보기가 되어준다.

불온한 갈망: 천국을 상상하다

프랑스의 문화인류학자 르네 지라르가 ‘시기’, ‘질투’ 같은 말들을 진지한 신학적 담론의 장으로 끌어들인 사람이라면, 루이스는 ‘기쁨’, ‘그리움’ 같은 말들을 깊이 있는 신학적 사유의 주제로 만든 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루이스는 독창적인 신학사상가는 아니었다. 그의 거의 모든 사상들은 다 교부들을 비롯하여, 보편적(catholic) 교회의 지적 영적 전통에 전거를 두고 있다. 하지만 기쁨(Joy)에 대한, 또 그 기쁨에 대한 그리움(Sehnsucht)에 대한 묘사와 신학적 해석에 있어서는 그는 그 어떤 기독교 작가보다도 탁월했고 독창적이었다.

루이스는 기쁨에 대해, 천국에 대해 말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의 주저들의 말미에는 거의 언제나 ‘천국’에 대한 부분이 등장한다. ‘현재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고통’의 문제를 다룬 책에서도, 그는 ‘장차 다가올 영광’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지 않고 있다. 특히 「고통의 문제」의 ‘천국’ 장과 ‘지옥’ 장은, 도대체 천국이 뭐고 지옥이 뭔지 모르겠다는 사람이라면, 아니 ‘천국의 가구와 지옥의 온도’에 대해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꼭 공들여 정독해볼 만한 부분이다.

루이스는 자신을 기독교 신앙으로 인도한 두 가지 길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이성’이고 다른 하나는 ‘상상력’이다. 변증가로서의 루이스가 명징한 이성적 사유로써 사람들에게 기독교 신앙이 ‘말이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면, 기독교 문학가로서의 루이스는 ‘세례 받은 상상력’(baptized imagination)을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천국의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을 미리 맛보게 해준다. 기독교에 입문하고서 만난 ‘예기치 못한 기쁨’에 놀란(surprised by Joy) 그는 천국을 향한 인간의 ‘불멸의 그리움’을 자신의 내적 여정과 인간실존을 이해하게 하는 실마리로 보았고, 더 나아가 복음전도를 위한 일종의 ‘접촉점'(point of contact)으로 삼았다.

그렇다면 루이스는 ‘내세도피주의자’였는가? 뜻밖의 답변으로 사람들을 놀래게 만들기를 즐겼던 것으로 보이는 루이스는 아마 이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했을 것 같다. 그는 어떤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도피(탈출)에 대해 반대하는가? 그렇다면 그는 간수임에 틀림없다.’

루이스가 말하는 천국은 한마디로 ‘하나님과의 연합’이며, 성부가 성자를 낳으시고 또 성령이 성부에게서 나오시는 그 삼위일체적 댄스에 우리가 동참하는 것이다. 천국을 죽음 너머 누리는 개인적 행복 정도로 생각하고 그런 천국을 희망하는 것은 실은 자기 건강을 돌보는 일이나 노후를 대비하기 위해 저축하는 일 같이 실은 종교와 아무 상관없는 일이다. 천국은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참된 목적이요 만족이 되는 곳으로서, 천국 소망은 하나님 자신을 중심에 둔 신앙에 뒤따르는 필연적 결론 같은 것이지 결코 그 자체가 독자적이고 자립적인 것이 아니다. 따라서 진정으로 천국을 희망하고 누리기 위해선 먼저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욕구’(appetite for God)가, 요즘 말로 하면 ‘영성’이 있어야 한다.

루이스는 인간의 내면에는 이 세상의 그 어떤 대상이나 경험으로도 충족될 수 없는 깊은 갈망이 있으며, 이 갈망은 그 원천이자 목표인 하나님을 가리켜주는 표지라고 말한다. 세속주의적 세계관에 기초한 현대의 교육은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갈망을 인식하지 못하게끔, 무시하게끔 만들어왔으나, 이 갈망을 인식하고 그것을 하나님을 가리키는 표지로 알아보는 것--즉, 천국을 ‘소망’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할 신학적 덕들(theological virtues) 중의 하나다.

이러한 갈망, 소망은 결코 도피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역사를 읽어보면, 이 세상을 위해 커다란 공헌을 한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천국에 마음이 사로 잡혀 있던 이들이었다. 루이스는 말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 속에서 이토록 무기력해진 것은 그들이 내세에 대해 더 이상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천국을 지향하라. 그러면 당신은 이 세상을 ‘덤으로’ 얻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을 지향하라. 그러면 당신은 천국도 잃고 이 세상도 잃어버릴 것이다....우리가 우리의 문명만을 주된 관심사로 삼을 때는 우리는 이 문명을 구원할 수 없다. 지금 우리는 문명 이상의 무언가를 추구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 ‘세상’은 이 세상 너머의 것을 지향하는 이러한 갈망을 불온시한다. 왜냐하면 이 갈망이야말로 이 세상을 안으로부터 전복시키는 힘이기 때문이다.

신화의 힘: 이교의 신들에게서 그리스도를 보다

루이스는 ‘신화’를 하나님이 인류에게 자신을 계시하신 여러 방식들 중의 하나로 보았다. 그는 묻는다, “다양한 이교 신화들 속에서 발견되는, 죽임을 당했다가 다시 살아나며, 그것을 통해 숭배자들의 삶이나 자연의 삶이 새롭게 변화하는, 그런 신들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루이스는 그런 신화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최고 계시에 대한 희미한 전조(foreshadowing)들이라고 말한다. 이교의 그리스도들(가령 Balder, Osiris)과 그리스도 자신 사이의 차이는 “거짓과 참의 차이가 아니라, 실제 일어난 사건과, 그 사건에 대한 희미한 꿈 내지 전조 사이의 차이다.”

“날마다 일어나는 밤과 낮의 교체, 해마다 일어나는 작물의 죽음과 재생, 그러한 자연 과정들이 일으킨 신화들, 인간 자신도 참으로 살기 위해서는 모종의 죽음을 거쳐야 한다는 그 명료하진 않지만 강렬한 느낌, 이런 것들 속에는 하나님이 근원적 진리에 대해 허락하신 유사성이 있다.” (「시편사색」 p. 151)

루이스는 하나님의 계시의 절정인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신화가 사실이 된 것”(Myth became Fact)로 이해한다. 즉,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 사건은 인류가 그간 꾸어왔던 “좋은 꿈”(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 세상에 구원이 온다는)이 실제 역사적 사실이 된 것이다. 기독교의 중심은, 신화가 ‘신화이기를 그치지 않고’(without ceasing to be myth), 사실의 세계 속으로, 실제 역사 속으로 내려온 것이다.

이러한 통찰에 기초하여 루이스는 우리가 성육신을 받아들이는 자세에 대해 이렇게 교훈 한다,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우리는 그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이라는 점에 동의해야할 뿐 아니라, 다른 신화들을 대하듯 그것을 상상력을 가지고 받아들여야 한다.” 즉,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의 실재는 우리의 영적 상상력에 호소하며 우리의 상상력 넘치는 응답을 요구한다. 루이스는 성육신이나 부활 이야기를 사실로서는 의심하지만, “신화로서 거기서 계속해서 양식을 얻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그는, 그런 이야기를 사실로서는 동의하지만 그에 대해 많이 생각하지 않는 사람보다, 영적으로는 더 살아있다”고 말한다. 물론, 우리는 기독교를 사실과 신화로서 다 받아들여야 한다. 성육신은 신화와 사실의 장엄한 결합이기 때문이다:

“이것은[기독교는] 하늘과 땅의 결혼이다: 완벽한 신화이면서 동시에 완벽한 사실이다. 단순히 우리의 사랑과 우리의 순종을 요구할 뿐 아니라, 우리의 놀라움과 기쁨도 요구한다.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도덕주의자, 학자, 철학자 뿐 아니라, 우리 각자 안에 있는 야만인, 아이, 시인들에게도 호소한다.”

길들여진 사자: 디즈니의 아슬란

참 신화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이야기가 어떻게 우리 안의 ‘아이’에게 호소하는 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나니아 연대기」의 두 번째 책인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이다. 이 책의 중심부에 자리하는 것은 ‘신적 존재의 죽음과 부활’ 모티브다. ‘나니아’의 창조자이자 진정한 왕인 사자 아슬란이 배신자를 위해 대신 돌 바위에서 죽고, 또 그 돌 바위를 깨뜨리고 다시 살아나, 겨울만 지속되던 나니아에 봄을 다시 가져온다는 이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이야기의 ‘재신화화’(remythologization)이며, 이 이야기가 아이와 (‘어린 아이 같은’) 어른 독자들에게 주는 재미와 감동은 그 ‘신화의 힘’에 기인한다.

그러나 헐리웃과 모들린 칼리지(루이스가 ‘나니아 연대기’를 집필했던 당시 재직했던 옥스퍼드 대학)는 아테네와 예루살렘만큼이나 서로 거리가 먼 것 같다. 실제 루이스를 알았던 사람들이 영화 ‘쉐도우 랜드’가 묘사하는 루이스의 모습을 불만스럽게 여겼듯이, 앤드류 아담슨 감독의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이 그려주는 사자 아슬란은 원작의 옷장 속으로 들어가 실제 아슬란을 체험했던 이들에게는 적잖은 실망감을 준다. 진짜 아슬란은 ‘길들여지지 않은’ 사자다. 무시무시하면서도 동시에 너무도 선한 존재, 루이스가 자신에게 큰 영향을 끼친 10권의 책 중의 하나로 뽑은「성스러움의 의미」에서 루돌프 오토가 말한 그 ‘두려움과 동시에 매혹을 주는’(the mysterium tremendum et fascinans) 신비한 존재다. 그러나 디즈니가 창조한 아슬란에서는 그런 초월적인 면모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는 감독의 한계라기보다는 영상이라는 매체 자체가 갖고 있는 한계일 것이다. 루이스는 생존 시에 아슬란의 시각화를 반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천국에서,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자신을 위해 죽고 부활하신 분을 만났을 그는 자신의 아슬란 역시 그 거룩한 사랑이신 분에 대한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상상이었던 것인가를 깨달았을 것이다. 이 깨달음은 곧 그에게 ‘기쁨’이었으리라.

'기독교사상' 2006년 3월호
“선생님, 정말로 나니아가 있어요?”

정인영


저는 경기도의 한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나니아 연대기를 읽어 주고 있습니다. 첫 해엔 한두 권만 읽어 주었는데 나중엔 아예 1년 동안 7권을 다 읽어 주었습니다. 초기엔 미리 읽어보지 못하고 읽어 준 책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에 아이들은 더 재미있어하더군요. 선생님이 책을 읽다말고 “얘들아, 이거 진짜 신기하지 않냐? 진짜 재밌다.”고 하면서 킥킥대고 있으니 아이들은 웃겼겠죠. 

이렇게 하다 보니 벌써 5년 넘게 나니아 연대기를 읽어 주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읽었습니다. 요즘엔 아이들과 함께 읽거든요. (아슬란을 제외한 모든 역할은 나누어 읽습니다. 아슬란은 권위 있는 인물이기 때문에 항상 제가 읽고 어쩌다 한번씩 읽을 기회를 줍니다. ) 저처럼 나니아 연대기를 5번 이상 소리내어 읽은 사람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5년 이상 아이들과 나니아 연대기를 읽으며 느낀 점을 나누고 싶습니다. 

1. 권위

먼저 ‘권위’입니다. 요즘이야 말로 아이들이 권위를 느끼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조선시대처럼 왕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일제시대처럼 모두의 존경을 받는 독립투사가 있거나 ‘독립’이라는 공동의 목표, 내 삶에 권위로 다가오는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민주화 투쟁도 지나갔고 통일은 피부로 와 닿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무서워하거나 존경할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예전처럼 ‘몽둥이를 들어서라도 인간을 만들자’는 부모도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나의 훈계가 아이들의 사고를 제한하지는 않을까?’ 조심하는 부모가 늘고 있습니다. 초등학생이 대통령을 ‘명박이’라고 부르는 시대이니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권위의 부재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부재와 연결됩니다. 아이들에게는 ‘자신보다 크고 대단하고 무서우며 그 앞에 엎드려야 하는 존재’가 없습니다. 하늘과 같은 왕도 없고, 햇빛과 같은 아버지도 없고, 별과 같이 모두가 우러르는 인물도 없습니다. 예전처럼 종과 주인의 관계도 경험할 수 없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이라는 말을 들어도 그에 맞는 이미지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엔 과학도 일조를 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이미지를 주지 못하면 자연이라도 주어야 하는데 요즘은 하나님을 태양이나, 불, 바다로 비유할 수도 없습니다. 태양은 거대한 가스덩어리이고 우리가 잘 이용해야 할 대상이며 주기에 맞추어 움직일 뿐입니다. 불은 어떤 물질이 산소와 결합하여 열과 빛을 내는 현상일 뿐입니다. 불을 어떻게 끌 수 있는지도 다 압니다. 바다 역시 잘 이용해야할 자원이며 인간은 이미 가장 깊은 마리아나 해구의 바닥까지 가 보았습니다. 아이들이 어디서 하나님의 이미지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이미지는 하나님이 아니니 걱정할 필요 없다고요? 루이스가 지적한 대로 이미지를 거치지 않고 하나님을 알 수는 없습니다. 어른들이 뭐라고 하던 아이들은 ‘하나님’이라는 말을 들으면 자신만의 이미지를 만들어 낼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미지는 하나님의 대한 오해를 낳기에 아주 적합하며 겉으로 표현하지 않기 때문에 어른이 될 때까지 점검할 기회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니아 연대기에는 하나님의 권위를 느낄 수 있는 존재가 있습니다. 바로 ‘아슬란’이라는 사자입니다. 아슬란은 노래로 나니아를 창조했으며 입김을 불어 넣어 동물들이 말을 할 수 있도록 합니다. 배신자를 위해 자기의 목숨을 바쳤으며 나니아의 모든 고통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길들여지지 않은 사자’이기 때문에 보고 싶다고 불러 낼 수 없습니다. 어려움이 닥쳤다고 해서 항상 도와주는 것도 아닙니다. 나니아의 비버는 아슬란을 ‘착하면서 동시에 무서운 존재’라고 얘기합니다. 잠시 대화를 들어 보시죠.

비버부인이 말했다.
“당연히 그렇겠죠. 만일 아슬란 님 앞에서 무릎을 덜덜 떨지 않을 수 있다면 아주 용감한 자거나 바보 멍청이거나 둘 중 하나겠죠.”
루시가 물었다.
“그럼 안전하지 않단 소리예요?”
비버 씨가 말했다.
“안전이라고요? 지금 우리 집사람이 한 말 못 들었나요? 누가 안전하다고 했죠? 당연히 안전하지 않아요. 하지만 좋은 분이세요. 아까 말했던 것처럼 그분은 왕이신걸요.”

‘착하면서 동시에 무서운 존재’는 권위의 양면을 얘기해 줍니다. 권위가 있으려면 착하기만 하거나 무섭기만 하면 안됩니다. 하지만 요즘은 착하면 무섭지 않고 무서우면 착하지 않습니다. 부모와 교사들은 착해지려고 노력합니다. 최대한 이해하고 받아주고 기다려 주는 것이 요즘의 미덕입니다. 무서운 부모와 교사아래서 자란 세대가 변화를 시도하는 것이니 좋게 봐주고 싶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런 착한 부모나 교사를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혼내지 않을 걸 알기 때문에 하고 싶은 대로 하죠. 또한 요즘 무서운 사람은 다 나쁜 사람입니다. 무서운 부모는 아이를 때리거나, 전혀 용서를 하지 않거나 감히 말붙일 생각을 못하게 만드는 부모입니다. 무서운 교사란 매를 들거나 욕을 입에 달고 사는 교사입니다. 또한 사회에서는 조직폭력배나 권력으로 횡포를 부리는 사람이 무서운 사람이죠. 어딜봐도 착하면서 무서운 존재를 만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아슬란은 나니아 국민을 위해 목숨을 내놓기까지 착합니다. 엄마가 병에 걸렸고 그게 항상 맘에 걸린 남자아이 앞에서는 눈물을 흘립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남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뉘우치면 누구라도 받아줍니다. 또한 아슬란은 무섭습니다. 하얀마녀를 한입에 끝냈으며 그의 포효소리 한번이면 나니아 전체가 두려움에 떱니다. 나니아 국민에겐 아슬란의 뜻을 따르든지 안 따르든지 두 개의 길 밖에 없습니다. 그의 뜻을 의심하거나 자의로 해석할 수 없습니다. 따르는 자는 구원받지만 따르지 않는 자는 죽습니다. 

5년 동안 나니아 연대기를 읽으면서 아슬란을 좋아하지 않는 아이를 본 적이 없습니다. ‘아슬란을 만나고 싶은 사람?’라면 모두 손을 듭니다. ‘얘들아 아슬란은 엄청 두려운 존재라고 했어. 너희를 잡아 먹을수도 있어. 그래도 만나고 싶어?’라고 해도 모두 손을 듭니다. ‘아슬란의 갈기에 파묻혀 얼굴을 비비고 싶은 사람?’하면 손을 들지 않는 아이들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 남자아이들로서 그 행동이 여자아이답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 역시 예전엔 ‘아슬란의 갈기에까지 파묻힐 필요가 있나’했지만 요즘은 바뀌었습니다. 그 품에 얼굴을 묻고 울다가 웃다가 소리지르고 노래도 하고 싶습니다.

아이들은 아슬란은 우리가 쉽게 어떻게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압니다. 그 앞에서 무례한 장난을 치거나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아이들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책에 명시되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책을 읽다 자연스럽게 느끼는 것입니다. 이점에선 루이스가 성공한 것 같습니다. 루이스의 말을 들어보시죠.

“그리스도의 고통을 느끼는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왜 그렇게 힘들었을까요? 그것을 의무라고 여긴 것이 가장 큰 이유인 것 같습니다. 무언가를 의무적으로 느껴야 한다면 감정은 굳어 버리지요. ……그러나 이런 것들을 교회 창문에 새기거나 주일학교 교리로만 가르치지 말고 상상의 세계로 보낸다고 생각해 보세요. 처음으로 그런 것들이 힘을 발휘하지 않을까요?”

어른 그리스도인은 모두 ‘하나님은 정의롭고 선하시다.’고 말하지만 그 말에 어떤 의미인지 잘 느끼지 못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그저 그렇게 들어왔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주형틀은 있지만 부을 쇳물이 없습니다. 하지만 아슬란을 보면 하나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모세가 떨기나무의 불 속에서 하나님을 보았듯이 우리 아이들은 아슬란의 포효소리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2. 의식 

두 번째 ‘의식’입니다. 의식 역시 하나님을 알아갈 수 있는 통로입니다. 의식이란 나보다 크고, 위대하며, 오래된 것과 접속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인지 성경에는 의식이 많이 나옵니다. 피흘리는 제사, 해마다 반복되는 절기, 정체성을 새기는 할례. 이 뿐 아닙니다. 신약에선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만찬과 세례의식도 남겨 주셨습니다. 

하지만 요즘 아이들은 의식다운 의식을 경험할 일이 별로 없습니다. 성인식도 하지 않고 책례도 하지 않습니다. 졸업식과 입학식은 형식적인 것이 많습니다. 결혼식장은 신혼부부생산공장 같습니다. 마을 공동체가 없기 때문에 추석이나 설같은 명절도 용돈 많이 받는 날이 되어 버렸습니다. 각종 국경일도 TV에서 하는 기념식을 보지 않는다면 어떤 날인지도 모릅니다. 뭔가 의미를 되새기고, 복장을 갖추고, 마음을 가지런이 하며 입을 다물고 귀를 기울일 일이 별로 없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나니아 연대기에는 의식이 많이 나옵니다. 나니아의 창조 자체가 하나의 의식이었으며 네 아이는 대관식을 거쳐 왕이 됩니다. 일주일씩 잔치가 벌어지기도 하고 모든 임무를 완수한 아이들이 아슬란과 나누는 대화는 의식처럼 치러집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도 의식을 경험하게 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단 책 한권이 끝나면 독서보고서를 쓰게 합니다. 물론 쓴다고 다 통과되는 것은 아닙니다. 쉽지 않습니다. 통과되면 아슬란 도장을 찍어줍니다. 이 도장은 아무 때나 찍어주지 않고 공을 들여 완수한 것에만 찍어줍니다. 의식은 아무나 참여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러면 아이들은 학급화폐로 직접 배지를 삽니다. 그냥 줄 줄 알았는데 사라고 하니 ‘안 사요!’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사지 말라고 합니다. 하지만 바로 꼬리를 내립니다. 나중에 아슬란 배지를 사려면 7권에 해당하는 배지가 다 있어야 하거든요. 한 권을 다 읽고 독서보고서까지 통과해야 배지를 살 수 있고 이 배지가 있어야 의식에 참석할 수 있습니다. 혹 배지를 집에 두고 온 아이는 학급화폐를 내고 대여해야 합니다. 의식은 엄숙하게 치러집니다. 전등을 끄고 커튼을 칩니다. 탁자를 마련하고 식탁보를 깝니다. 초를 켜고 와인잔에 포도주스를 따르고 나니아 옷장문을 통해 입장합니다. 명구를 외우고 잔을 부딪히고 소감문을 발표합니다.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눠 주셔서 감사합니다.’같은 인사말을 주고 받습니다. 준비해 온 음식을 나눕니다.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선 의식의 내용을 기억하지는 못할 것입니다.(제 기억력으로 보자면 거의 확실합니다!) 다만 의식의 분위기를 기억할 것입니다. 공을 들여야 하고, 참여하기 위해선 준비를 해야하고, 말을 아끼고 상대방에 집중해야 하며, 어른으로 대우받았던 흐뭇한 이미지 하나를 기억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나중에 ‘하나님’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이 이미지가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과학적 사고로부터 잠시 벗어나기

세 번째 과학적 사고로부터 잠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앞부분에서 말씀드린 대로 과학은 자연에서 신성을 벗겨 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을 숭배할 위험에서 벗어났지만 자연에서 하나님의 신성을 볼 기회도 빼앗겼습니다. 자연을 보며 감탄하지 않습니다. 섭리를 느끼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입김이 지금도 자연에 힘을 주고 있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렇다보니 자연스럽게 기적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니아는 동물이 말을 합니다. 아이들은 신기해 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말을 하는 것은 신기해 하지 않습니다. 나니아가 건국될 때는 땅에 동전을 심으면 동전나무가 자라고 사탕을 심으면 사탕나무가 자랐습니다. 참 신기하죠. 하지만 씨앗을 땅에 심으면 토마토도 되고 사과도 되고 봉숭아도 된다는 것은 신기해 하지 않습니다. 작고 검은 것을 심으면 크고 화려한 것이 나온다는 것을 신기해 하지 않습니다.

나니아는 아슬란이 노래로 창조했습니다. 아이들이 아주 신기해 합니다. 그러면 제가 묻습니다.

“얘들아, 나니아는 노래로 창조했대. 그럼 우리세계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좀 똘똘한 아이들은 빅뱅을 얘기합니다. 그러면 제가 묻습니다.

“빅뱅은 시간도 공간도 없는데 폭팔이 일어났고 그 폭팔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었으며 지금도 빛의 속도로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이론이야.”

이렇게 얘기를 해 주어도 아이들은 우리세계가 더 신기하다고 합니다. 그러면 다시 몇 번 설명을 합니다. 그러면 똘똘한 아이들은 그제서야 우리 세계가 더 신기하다고 말을 합니다. 

성경의 오병이어 기적이나 물이 포도주로 변한 기적을 받아들이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시간낭비일 때가 많습니다. ‘성경에 얼마나 기적이 많이 나오냐. 하나님은 기적을 행하실 수 있는 분이다.’라고 얘기하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많습니다. 오히려 ‘우리 세계의 존재 자체가 기적이다. 제대로 보기만 하면 우리 삶에 기적이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얘기하는 것이 더 맞습니다.

나니아는 우리세계를 비교하다 보면 우리세계가 얼마나 신기한지 알 수 있습니다.

4. 천국에 대한 그리움

네 번째, 천국에 대한 그리움입니다. 나니아 연대기를 읽으면 아이들이 항상 질문하는 것이 있습니다. 

“선생님, 나니아가 정말로 있어요?”

똘똘한 아이들은 그 아이를 보면서 혀를 쯧쯧 찹니다. 

“야, 그걸 믿냐? 그건 책에서나 나오는 거지.”

그러면 제가 묻습니다.

“아, 그렇구나. 그럼, 책에 나오는 것은 다 실제로 없는 거네?”

“그건 아닌데요. 이건 소설책이잖아요. 다 상상해서 쓴 거라고요.”

“그렇구나. 그럼 두 가지만 질문하자. 첫째, 소설속에 나온 이야기는 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겠네? 둘째, ‘나니아’라는 나라는 없어도 나니아 같은 나라도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이 쯤 되면 진지한 토론이 시작됩니다. 물론 이야기를 길게 이어갈 실력이 있는 아이들은 별로 없습니다. 공정하게 토론이 진행되면 대개 알 수 없다는 식으로 마무리 됩니다. 하지만 나니아가 정말로 존재하냐고 물었던 친구에게 혀를 찼던 그 아이는 다음 번에도 코웃음을 치긴 힘듭니다. 게다가 나니아는 소설속의 나라일 뿐이라고 하는 친구도 ‘나니아가 정말로 존재한다면 가고 싶은 사람?’라고 물으면 손을 번쩍 듭니다. 돌탁자에 앉아서 고대글씨를 만져보고 베루아 평원을 달리며 비버의 집에 초대받고 배불뚝이 곰 삼형제의 동굴을 방문하고 싶어합니다. 캐어패러벨 성의 네 왕좌에 앉고, 무도회에 참석하며 새벽출정호를 타고 동쪽바다로 나가고 싶어합니다. 무엇보다 마녀의 터키젤리를 먹고 싶어 합니다. 그러면 제가 얘기해 줍니다.

“얘들아, 옛날의 그 터키젤리는 마법의 터키젤리는 너무 위험해서 구할 수 없어. 대신 지금 나니아의 비버 기념품점에 가면 독성은 없지만 맛은 똑같은 터키젤리를 살 수 있단다. 다음에 내가 나니아에 가면 한번 구해볼게.”

아슬란이 직접 말했습니다.
“내 나라로 통하는 길은 어느 세계에나 있느니라.”

또한 나니아의 탄생을 지켜 보았던 디고리커크 교수님은 피터의 질문에 이렇게 답합니다.

피터가 말했다.
“그렇다면 교수님께선 정말로 다른 세계가 있을 수 있다는 말씀이세요? 여기저기 어디에나, 바로 코앞에도요?”
“암, 있을 수 있고말고.”
교수는 안경을 벗어서 닦으며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요즘 학교에서는 도대체 뭘 가르치는지 모르겠군.”-공립학교 교사로서 작가에게 강하게 불만을 갖고 있는 대목입니다.

어디에서나 나니아로 갈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기쁨인지 모릅니다. 아이들은 꿈을 꾸죠. 만약에, 정말로 만약에 나니아가 존재하고 또 나니아에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3월부터 지금까지 끈질기게 제게 질문을 던지는 아이가 있습니다.

“선생님 정말로 나니아에 가 보셨어요? 나니아가 정말로 있어요?”

그러면 전 놀라지도, 귀찮지도 않은 말투로 대답합니다. 

“음.”

그럼 또 묻습니다.

“에이, 거짓말. 그럼 다시 가 봐요. 어디서나 갈 수 있다고 했으니까 여기서, 우리 반 옷장을 통해 가 봐요.”

그럼 전 역시 동일한 말투로 답합니다.

“근데 나니아는 내가 가고 싶다고 해서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야. 아슬란이 불러야 갈 수 있어. 또 아슬란은 길들여지지 않은 사자라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단다. 디고리의 말 기억안나? 정말이지 나니아에 가려고 절대 애쓰지 말라는 말. 언젠가 너희들이 생각지도 않은 순간에 가게 될 거라는 말. 나도 이 말밖에 해줄 수가 없구나.”

방금의 몇 문장을 읽으면서 낯 선 나라로 여행을 떠나기 전날의 흥분이나, 처음 듣지만 나를 사로 잡은 음악, 구절 하나 하나가 내 몸에 와서 달라붙는 시, 온 몸을 개운하게 하는 향기를 떠올리신 분이 있다면 역시 나니나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루이스의 말대로 우린 천국아닌 것을 사모해 본적이 없습니다. 나니아 연대기를 읽는 아이들 역시 나니아를 사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상이 제가 나니아 연대기를 아이들과 함께 읽으면서 느낀 점입니다. 5번을 더 읽으면 어떤 소감이 추가될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전혀 다른 이야기를 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대가의 눈을 가지신 분이 있다면 그것이 전혀 다른 이야기가 아님을 아시겠죠. 오히려 같은 소설을 한국어와 영어로 읽듯이 전혀 다른 글자들이 같은 이야기를 말하고 있고, 전혀 다른 표지판이 같은 곳으로 인도하고 있음을 아시겠죠. 그리고 그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진행될 것입니다.



Concepts create idols, only wonder understands.

- Gregory of Nyssa
If you could understand a single grain of wheat, you would die in wonder.

- Martin Luther (quoted by Kathleen Norris, Amazing Grace)
Yet I am the necessary angel of earth, 
Since, in my sight, you see the earth again.

- Wallace Stevens, Collected Poetry and Prose (New York: Library of America, 1997), p. 423.
Wonder must be the advent or the event of the other.

- Luce Irigaray, An Ethics of Sexual Difference
God does not die on the day when we cease to believe in a personal deity, but we die on the day when our lives cease to be illumined by the steady radiance, renewed daily, of a wonder, the source of which is beyond all reason.

- Dag Hammarskjöld, Markings
One’s destination is never a place, but rather a new way of looking at things.

- Henry Miller, Big Sur and the Oranges of Hieronymus Bosch